국내 단편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 저의 주관적인 느낀 점을 적어봤습니다.
- 장르 : SF, 판타지
- 작가 : 김초엽
- 국내 출판일 : 2019. 6. 24
목차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
1.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성인이 되기 전에 마을을 떠난 ‘데이지’가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 지구로 떠나는 순례자들 중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구에서 어떤 걸 경험했길래 돌아오지 않는 걸까.
2. 스펙트럼
낯선 행성에 조난 당한 ‘희진’은 ‘루이’라는 외계인을 만나 그들의 아지트에서 산다. 대를 거듭하여 희진이를 돌봐주는 루이들. 희진은 그들과 이곳에서 10년간 지낸다.
3. 공생 가설
왜 아기들은 크면서 기억이 사라질까. 혹시 그들이 인간이 아닌 생명체와 공생했기 때문에 지성이 발달된 게 아닐까. 그들은 왜 아기들의 기억을 지우고 가는 걸까.
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한 노인이 운행하지 않는 우주 정거장의 대합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이주한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정거장을 폐기하러 온 남자는 그녀에게 그만 기다릴 것을 청한다.
5. 감정의 물성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특정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정하’는 연인 ‘보현’이 우울이라는 감정의 물성을 갖고 사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6. 관내 분실
고인의 뇌를 스캔하여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 납골당 대신 고인의 기억을 토대로 한 시뮬레이션을 볼 수 있는 곳. ‘지민’은 그곳에서 사라진 엄마의 데이터를 찾아 나선다.
7.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주 밖의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터널의 존재. 여성 우주인 ‘재경’이 우주선에 탑승하지 않고 바다로 빠져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불명예 우주비행사로 낙인찍힌다. 같이 살던 ‘가윤’은 재경의 뒤를 따라 우주인이 되려고 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후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는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 싶은 내게 마침 필요한 내용이었다. 장르는 SF/판타지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공상과학소설과는 사뭇 달랐다. 세계관은 지금과 다를지언정 그 속에서 풀어나가는 인간관계나 서사 방식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총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는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미래사회를 다루고 있다. SF 판타지적 요소가 각각의 세계관에 녹아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인간관계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를 넘어 우주까지 인간의 영역이 넓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인간소외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문득 픽사 애니메이션 <월-e>가 생각났다. 쓰레기로 뒤덮인 지구를 떠나 거대한 우주선 안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공지능 로봇이 모든 걸 봐주는 우주선에서 사람들은 ‘나’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성을 잃게 될까?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이란, 이타적이고 선한 마음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다수와 다른 소수를 멸시하고 배척하는 마음도 뜻한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사람의 본성까지 진화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세계관이 달라도 감정 이입이 되는 포인트가 많았을 지도 모른다.
모든 에피소드가 하나같이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졌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 중에서도 3번째 에피소드였던 <공생 가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아무도 모르는 행성을 그려냈던 류드밀라. 그녀가 그린 세계를 보며 왠지 모를 정감과 추억을 느끼는 사람들. 초반에는 마치 가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는 류드밀라가 허언증 환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엄청나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사람들이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면 그녀 혼자만이 그림에서 그쳤을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소에서 발견한 아기들의 뇌 속 언어는 류드밀라의 행성에서 온 ‘그들’의 존재를 의미했다. 우리 뇌 속에 들어와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감정들을 알려주고 떠나는 존재. 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치관이 정립될 때까지 줄곧 함께 했다.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기를, 아름다운 것을 보며 느낄 수 있기를, 이타적인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시기부터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류드밀라. 곁에 아무도 없던 외로운 그녀가 그들에게 ‘나를 떠나지 말아요’라고 메시지를 던졌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일반적으로 그들이 떠나면 점점 존재를 잊어가지만, 그녀는 잊지 않고 꾸준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난 그들이 그녀와 쭉 함께 했으리라 생각한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 실체가 없는 ‘그들’이라도 잡고 싶었던 류드밀라의 심정은 어땠을까. 고독하다 못해 지독하게 외로웠던 그녀의 마음에 100%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어렴풋이 상상해보았다. 내가 성장하도록 이끌어주고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준 그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겠지?
후반부에는 류드밀라의 삶에 초점이 맞춰졌고, 나는 한 줄 한 줄 읽을수록 마음이 먹먹해졌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을는지. 그렇게라도 그녀의 곁에 남아준 그들에게 고마움까지 느꼈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류드밀라가 그들과 평온하게 잠들길 바라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에서 두 번째로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6번째 이야기 <관내분실>이었다. 고인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데이터로 남긴 미래사회의 납골당(?).
살아생전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엄마. 그런 엄마의 데이터가 관내분실 되었다는 소리에 딸 ‘지민’은 데이터를 찾으려 애쓴다. 초반까지만 해도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친하지도,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던 엄마의 데이터가 사라졌다고 하니 왜 이제서야 찾는다고 하는 걸까. 이제 와서 고인이 된 엄마의 데이터를 찾아 무얼 하겠다고.
인덱스가 없는 데이터를 찾기 위해 지민은 엄마의 삶을 찾기 시작한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기 전에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지민 엄마가 되기 전에 ‘김은하’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때. 김은하라는 이름이 사라지기 전, 그녀 또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1인칭 시점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예전엔 미처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엄마의 과거. 불현듯 생각했다. 난 우리 엄마의 과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엄마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잘 물어보지 않았다. 자세하진 않지만 대략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 엄마는 국사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역사 중에서도 조선시대를 매우 좋아해서 지금도 조선시대 관련 책과 강연 방송, 다큐멘터리, 사극을 즐겨보신다. 항상 내게 조선시대 이야기를 신나게 설명해주는 사람. 그래서 내가 조선왕조실록 책도 선물해준 적이 있었다. 학생 때 국사가 재밌다고 말하자, 엄마가 ‘나도 그랬는데!’라며 공감을 내비친 기억이 난다. 그러려니 했다. 엄마와 내 취향이 그냥 같겠거니. 거기서 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관내분실> 에피소드에서 코가 찡했던 이유는 우리 엄마를 바라보는 나 자신이 계속 그려졌기 때문이다. 난 그리 붙임성 있는 성격도 아니고, 엄마가 내게 거는 기대에 부담을 느낀다. 첫째 딸은 듬직하고 의지된다고 말하는 게 왠지 달갑지 않았다. 그 기대를 충족해야만 엄마에게 ‘좋은 딸’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 또는 압박 때문이었나.
유난히 공감이 많이 갔던 구절이 있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흔히 애증이 얽힌 사이로 표현된다.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삶을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딸.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앓는 딸과 딸에 대한 애정을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하는 엄마.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세대를 살아야 하는 모녀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는 없는 묘한 감정이 있다.
이야기 속 ‘지민’은 임신한 후, 직장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 됐다. 왜 여자는 출산과 함께 직장 내 자리가 없어질까 봐 걱정해야 하는가. 여자는 가정과 일 중에 꼭 하나를 택해야 하는가. 두 가지를 다 챙길 수는 없는가. 왜 워킹맘은 있고, 워킹대디란 표현은 별로 없는가.
우리 엄마도 이야기 속 김은하 씨 같은 생각을 해봤을까? 앞서 말한 <공생 가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면, <관내분실>은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난 엄마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늘 감사하게 느끼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하고 내게 관심을 덜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는다. 이 책의 첫 번째 에피소드이자, 책 표지 뒷면에 적힌 구절이 이런 식으로도 와닿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엄마는 내게 힘들면서도 행복이 되는 존재다.
나도 언젠가 ‘지민’처럼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가끔 생각해본다. 내가 과거로 돌아가 엄마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난 엄마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난 나와 동갑인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결혼이 의무였던 세대였더라도 말해주고 싶다. 네 인생에선 네가 항상 1위야.
억지로 감정을 자극해서 신파극처럼 울리는 책이 아니다. 독자를 울리려는 의도로 쓰인 책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각 이야기들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아리다. 가슴이 아리지만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 내가 유난히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여운 짙다고 한 소설들에서도 이만큼의 쓰나미 같은 여운은 받아본 적이 없다.
이따금 너무 지쳐 감정이 메말랐다고 느껴질 때,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가 생각날 것 같다. 단언컨대 에피소드 하나씩 따로 읽어도 좋을 정도로 소장 가치가 높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책으로 사길 잘했다. 이 책을 추천해주신 분에게도 너무나 감사드린다.